잉글랜드 아르헨티나 축구 라이벌 역사(월드컵)
2026 북중미 월드컵이 스페인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어요. 대회가 끝나고 나니, 저는 자꾸 한 경기가 다시 떠올라요. 준결승에서 잉글랜드가 아르헨티나에 역전패했던 그 밤이요. 영국에서 7년을 살았던 저에게 잉글랜드의 월드컵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브리스톨과 캔터베리의 펍에서 잉글랜드 경기를 지켜봤던 사람으로서, 이번 대회를 정리하며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이 두 나라의 오래된 축구 악연을 한번 짚어보고 싶었어요.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2026 월드컵 준결승, 마지막 7분의 드라마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아르헨티나의 2-1 역전승이에요. 역전승이란 먼저 실점해 뒤지던 팀이 경기를 뒤집어 이기는 것을 말하는데, 이날 경기는 역전의 교과서 같은 경기였어요. 애틀랜타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후반 55분 앤서니 고든의 골로 앞서갔어요. 모건 로저스의 정확한 크로스를 고든이 마무리한 장면이었지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잉글랜드의 투헬 감독이 리드를 지키려고 일찌감치 로우 블록을 선택했거든요. 로우 블록이란 수비 라인을 자기 진영 깊숙이 내려 골문 앞을 잠그는 수비 전술을 말해요. 그런데 상대가 하필 아르헨티나였던 거예요. 85분 엔소 페르난데스가 중거리 슛으로 동점을 만들었고, 정규 90분이 끝난 뒤 주어지는 스토피지 타임(추가시간)에 라우타로 마르티네스가 헤더로 경기를 뒤집었어요. FIFA 공식 매치센터 기준 최종 스코어 1-2. 잉글랜드의 60년 만의 결승 진출 꿈은 마지막 7분 사이에 무너졌어요.
메시의 밤, 골 없이 경기를 지배하다
이날 메시는 골을 넣지 않았어요. 그런데 경기의 주인공은 메시였지요. 동점골과 결승골 모두 메시의 어시스트에서 나왔거든요. 어시스트란 득점으로 직접 연결되는 마지막 패스를 말하는데, 서른아홉 살의 메시가 준결승 무대에서 결정적인 패스를 두 번이나 만들어낸 거예요.
흥미로운 사실 하나. 메시가 국가대표 커리어에서 잉글랜드를 상대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해요. 20년 넘게 축구를 하면서 두 팀이 한 번도 안 만났다는 게 신기하지요.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맞대결 자체가 21년 만이었으니까요. 그 첫 만남에서 메시는 잉글랜드 팬들에게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자신을 각인시켰어요. ESPN 경기 리포트는 이 경기를 "7분 만에 완성된 또 하나의 아르헨티나식 역전극"으로 정리했더라고요.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40년 라이벌의 역사
영국 언론이 이 경기를 몇 주 전부터 대서특필한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두 나라의 축구 라이벌 관계는 월드컵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서사 중 하나거든요.
시작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에요. 마라도나가 잉글랜드전에서 손으로 공을 쳐 넣은 골, 그 유명한 '신의 손(Hand of God)'이지요. 심판이 손을 보지 못해 골로 인정됐고, 마라도나는 경기 후 "신의 손이 넣은 골"이라고 말해 잉글랜드를 두 번 울렸어요. 같은 경기에서 마라도나는 하프라인부터 잉글랜드 선수 대여섯 명을 제치고 '세기의 골'까지 넣었고요. 한 경기에 축구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된 골과 가장 위대한 골이 함께 있었던 거예요.
배경에는 축구 밖의 상처도 있어요. 1982년 두 나라는 포클랜드 제도를 두고 실제 전쟁을 치렀거든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16강에서는 젊은 베컴이 시메오네에게 발길질을 해 퇴장당했고, 잉글랜드는 승부차기 끝에 탈락했어요. 당시 잉글랜드에서 베컴 인형 화형식까지 벌어졌을 정도로 후폭풍이 컸지요. 베컴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그 한을 풀었고요. 그리고 21년의 공백 끝에 성사된 이번 준결승에서, 승리의 여신은 다시 아르헨티나의 손을 들어줬어요.
영국 펍에서 직접 본 잉글랜드의 월드컵
영국에 살면서 가장 신기했던 풍경 중 하나가 월드컵 시즌의 거리였어요. 잉글랜드 경기가 있는 날이면 집집마다, 차마다 잉글랜드 국기가 내걸려요. 우리가 아는 유니언잭이 아니라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세인트 조지 크로스요. 영국에 살기 전에는 저도 이 두 국기의 차이를 몰랐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저는 브리스톨에 있었어요. 잉글랜드가 포르투갈과의 8강에서 승부차기로 탈락하던 날, 펍 안의 공기가 한순간에 가라앉던 걸 지금도 기억해요. 경기 시간에는 거리가 텅 비어요. 다들 펍이나 집에서 경기를 보고 있으니까요. 골이 들어가면 동네 전체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는데, 어느 집에서 보고 있는지 소리로 다 알 수 있을 정도예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캔터베리에 살았는데, 잉글랜드가 16강에서 독일에 1-4로 대패했어요. 램파드의 슛이 골라인을 확실히 넘었는데 골로 인정되지 않았던, 그 유명한 '유령 골' 경기였지요. 다음 날 만난 영국인들은 하나같이 "gutted"라고 하더라고요. 직역하면 '내장이 뽑힌'이라는 뜻인데, 영국인들이 진짜 참담할 때 쓰는 표현이에요. 이번 준결승이 끝나고 BBC Sport가 올린 팬 인터뷰 릴스에도 잉글랜드 유니폼을 입은 부부의 얼굴 위로 이 단어가 떠 있었어요. 16년이 지나도 잉글랜드 팬들의 어휘는 그대로구나 싶었지요.
재미있는 건 같은 영국 안에서도 온도차가 크다는 거예요. 스코틀랜드에는 'Anyone But England', 그러니까 "잉글랜드만 아니면 누구든 응원한다"는 정서가 있거든요. 이번 준결승을 앞두고 BBC가 올린 거리 인터뷰 릴스에서도 한 여성이 웃으며 "아르헨티나가 이기면 좋겠다"고 말해 화제가 됐어요. 이 이야기는 따로 한 편으로 풀었으니 궁금하신 분은 아래에 글 링크 있으니 읽어보세요.
잉글랜드는 동메달, 아르헨티나는 준우승으로 마감
잉글랜드는 3위 결정전에서 프랑스를 6-4로 이겼어요. 3위 결정전이란 준결승에서 탈락한 두 팀이 동메달을 놓고 겨루는 경기인데, 전반에만 4골을 몰아넣고도 후반에 프랑스에 3골을 내주며 진땀을 뺀 끝에 지켜낸 승리였지요. 벨링엄이 마지막 골을 넣으며 경기를 마무리했고요. 1966년 우승 이후 잉글랜드의 월드컵 최고 성적이 됐어요. 동메달이 결승행의 아쉬움을 덮어주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웃으며 대회를 마칠 수 있었던 거예요.
정작 아르헨티나도 결승에서 웃지 못했어요. 디펜딩 챔피언, 즉 직전 대회 우승팀 자격으로 스페인과 맞붙었는데,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페란 토레스에게 결승골을 내주며 1-0으로 졌거든요. ESPN 결승전 리포트에 따르면 스페인은 2010년 이후 16년 만에 두 번째 우승을 들어 올렸고요. 잉글랜드를 무너뜨렸던 그 팀이, 정작 자신들도 트로피 앞에서 무너진 셈이에요. 준결승에서 그렇게 짜릿했던 아르헨티나가 결승에서는 유효슈팅 하나 없이 조용히 물러났다는 게, 축구는 정말 끝까지 모른다는 걸 다시 한번 보여줬어요.
대회가 다 끝나고 나서 돌아보니, 저 준결승 하나가 두 팀 모두의 운명을 갈랐던 것 같아요. 잉글랜드에게는 60년 기다림이 다시 4년 늘어난 밤이었고, 아르헨티나에게는 메시의 마지막 월드컵을 결승까지는 끌고 간 밤이었으니까요. 우리 아이들은 새벽 경기를 보려고 일어나서 "엄마는 어느 팀이야?"라고 묻더라고요. 7년을 살았던 나라의 팀이 지는 걸 보는 마음은, 응원과 정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아요.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이 오래된 라이벌전의 다음 장은 아마 4년 뒤에나 다시 쓰이겠지요. 마지막까지 아쉬웠던 점은 케인이 있을 때 영국이 월드컵 우승하는 걸 보고 싶긴 했었는데 말이죠.
